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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유랑의 삶/NewYork뉴욕

[뉴욕] 40불, 안녕.

by naebido 2012. 9. 1.
얘네는 랭귀지 수업 교재를 빌려준다. 공짜로 빌려주는 게 아니고 40$을 디파짓한다. 이때 돈 잘 받았다는 영수증을 책 맨 뒷 붙어있는 비닐 주머니에 꽂아준다. 일정이 모두 끝난 후 책과 그 영수증을 반납하면 디파짓한 돈을 돌려주는 시스템이다.

손 때 새카맣게 탄 헌 책 한권 빌려주면서 물이나 커피를 엎지르지도 말 것이며, 펜으로 끄적이지도 말고, 꾸기거나 접지도 말고 온전히 나눠줄 때랑 똑같은 상태로 유지하라며 어찌나 주문이 많은지 몇 일 수업들어보니 신경쓰기도 귀찮고 해서 아마존에서 책을 주문해버렸다. (새 책 25$)
엊그제 숙소로 도착했길래, 수업 때 챙겨갔다. 그리고 데스크에가서 '너네가 빌려준 책을 돌려줄테니 내 돈을 다오.' 하니 아무 때나 할 수가 없고 매주 금요일에만 가능하댄다. 아 놔.. 그까이꺼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몇 일 안됐지만 지내보니 얘네는 일하는게 참 융통성이 없다고나 할까, 뭔가 룰에 아주 철저하긴 한데 그래서 답답한 면이 있다. 하나의 입력에 하나만 반응하는 자판기 같기도 하고, 한국의 동사무소 직원들 같기도 하고... 뭔가 파생되는 부가적인 상황들에 대해서는 신경써주거나 미리 챙겨주질 않는다. 하나를 물으면 알아서 이러 이러한 상황들을 체크해주고 개인에 맞게 배려해 주는 일처리 없다는 얘기다.

거기서 '알았어 그럼.' 했어야 했다.

왜 일이 꼬일려면 꼭 그렇게 뭔가 여느 다른 날과는 다른 상황에 놓이는걸까.
하루종일 새 책과 함께 2권을 다 들고 다녀야하는데 하필 그날은 저녁에 다른 수업까지 있어서 정말 가방이 수험생 수준으로 무거운거다. 좀 짜증이 나서 '그럼 여기 데스크에 맡겼다가 금요일에 찾으면 안될까?' 하니 그건 안되고 '너네 선생한테 물어봐. 그 방에 있는 티쳐 캐비넷을 쓸 수도 있을꺼야' 한다.
(선생 방이 따로 있는게 아니고, 수업하는 각 방마다 한개씩 Teacher's Cabinet 이라고 써 붙여진 작은 장이 하나씩 있다) 선생한테 가서 '책 반납은 금요일에만 된다고 하는데, 내 책을 너 티쳐캐비넷에 넣어줄 수 있겠니?' 하니 완전 또 오바쟁이 포즈와 표정과 목소리로 '그럼!! 맘껏 쓰렴! 저기에 넣어 둘 수 있어' 한다. 철썩 같이 믿고 나의 책을 건넸다.

아 놔.. 진정하고 잊고 있었는데 글로 쓰고 있자니 또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나의 책은 사라졌다.
난 티쳐 캐비넷이라고 하길래 지네들만 쓰는 열쇠가 따로 있거나, 뭔가 안전한 공간이라고 생각한건데 전혀 아니었다. 아무나 열고 가져갈 수도 있는 거였다. 

오늘 내가 캐비넷을 마구 헤집고 있는 걸 본 선생은 마치 무슨일이 벌어진건지 짐작도 못하겠다는듯이 '무슨 문제가 있니?' 한다. 아 진짜 황당하더라. 여기에 둔 책이 없다고 하니까 첨엔 책을 왜 거기 뒀냐는 듯, 거기 둔게 확실하냐고 묻더니 내가 완전 어이없다는듯 쳐다보니 (니가 넣어둔대매!!라는 뜻으로) 그제서야 기억이 살짝 나는지 한번 들여다 보고는 캐비넷에 남아 있는건 모두 선생용 책이라며 혹시 그 다음 수업 선생이 착각하고 너꺼랑 바꿔 가져갔을 수 도 있으니 물어보겠다고한다. (그거 물어보고 답을 듣는데 수업마치고도 2시간 걸렸다. 돌아온건 그 선생은 캐비넷 사용 한적이 없다는 대답. 야호!!)

암튼 없어진 책이 나타날리는 없고, 다시 Office에 가서 자초 지종을 얘기했다. '너가 말한대로 선생 허락받고 캐비넷에 넣어뒀는데 책 없어졌다. 어떡하지?' 했더니 '선생이 사용할 수 있다고 허락했어도 교실에 책을 두는건 권하지 않고 있어. 그건 너의 책임이야.' 한다. 쿨하다. '저런, 내가 얘길 했었어야 하는데..' 따위의 추호의 미안한 기색, 없다. 야호!!
아니 애초에 '그렇지만 없어질 수 있어.' 라거나 '안전하지는 않다'거나.. 뭐 그런 얘길 해 주면 안되겠니??? 응?
얘네 사고방식으로는 내가 물었어야 하나보다. '근데 거기에 둬도 안전한거니" 라고.

더욱 가관은 최악의 경우 책을 완전히 분실했다고 치고, 내가 완전히 같은걸로 새 책을 샀는데 이게 25$이다. (디파짓한 돈은 40$)
그러니 이걸 주면 15$만 패널티로 할 수 있냐니깐, 처음에 나눠준 '그 영수증'이 없기 때문에 안된댄다. 그래서 그럼 영수증이 있다면 되냐니깐, 그럴 수도 있댄다. 중요한건 영수증이라며.
완전 그지 같이 너덜한 책 대신에 새 책 + 15$ 준대도 안 바꿔준다는 희한한 애들이다.

뭘 물어보면 막 친절하게 이말 저말 (확실하게 알지 못할 때도 단호하게 몰라서 미안. 하지 않고 이말 저말 뭘 마구 지껄이는 경향이..) 막 건네는데 그저 툭 권하거나 해보는 말인거지, 그 말에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챙겨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의사 결정을 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미국에선 특히나 자기껀 자기가 잘 챙겨야 한다'는 친구 얘기가 어떤 얘긴지 실감이 난다.

그리하여 나의 40$은 날아가게 되었다는 슬프고도 재밌는 이야기.  야호!

ps. 한국이라면 맡겨 준대도 못 미더워서 안 맡겼을 내가. 이런 짓을 벌이다니!! 아깐 정말 너무 화딱지 나고 지쳐서 MOMA에 갈려던 계획도 포기. 한인타운 수퍼에 들러 캔커피랑, 햇반과 반찬을 사서 숙소로 왔다. 밥이나 먹고 자버려야겠다.는 심정으로. 간만에 한국 식단으로 맛있게 먹고 나니 진정은 좀 되는데 정성들여 구운 스팸을 죄다 뒤엎어서 또 화딱지. 아웅.

2012/09/01 - [뉴욕뉴욕] - [뉴욕] 31일의 금요일 - 짜증 콤보 3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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